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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아팠냐? 나도 아팠다!

디돌 2018. 8. 29.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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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아팠냐? 나도 아팠다! 

 

 

우리 큰 상전 군이는 2015년이 다가도록 마음을 열지 않는 대신 입을 많이도 열었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멍때리기의 달인으로, 조금만 가까이 가도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를 했다. 마당 산책시에도 즐거움 보다는 귀차니즘으로 일관하며 두어발짝 걷고는 주저 않아 버렸다. 

 

상당히 긴 기간동안 지하에 거하며 산책할 일이 드물었던 아이는 거대한 몸집에 비해 다리가 많이 가늘었다. 그런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걸으며 일방적인 사랑고백을 해댄다... 그런 나의 짝사랑에는 반응이 없고 밖에 지나가는 남자의 인기척에는 벌떡 일어나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주시하며 끙끙거린다. 그럴때마다 나는 군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또 사랑을 고백한다. 그렇게 큰 상전은 내 눈길을 피하고 나는 그 아이의 눈길을 따라 같이 움직이며 집안 족보를 나열하곤 했다. 

 

2015년의 마지막 날을 며칠 앞둔 날, 그날도 나는 그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사랑한다’ 며 족보를 읊조리고 있었다. 눈을 피하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더니 왼발을 슬쩍 내민다. 그 손을 잡고 혹시나 하면서 뽀뽀도 요구해 본다. 순간 얼굴에 거대한 침 자국이 생긴다. “오,마침내!”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그 녀석은 다시 눈을 돌려 버린다.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린 사람은 씩 웃으며 오버해 버린다: “부끄럽니? 부끄럽지! 귀엽긴! 악” 손에 다시 보라색 피멍이 든다. 그래도 조금씩 강도가 약해지는 것 같다는 위로감이 드니 다행이다. 

 

그렇게 우리는 2016년 새날을 맞았다. 늘 먹던 닭가슴살 양배추 조합이 아닌 특별 요리를 준비했다. 새해 떡국 대신 특별 저녁 만찬으로 돼지 갈비를 양배추와 푹 고아서 먹였다. 돌이가 하나를 해치울 동안 그녀석은 5개도 모자란다. 그 엄청난 이빨로 ‘우거적!’ 하면 몇번의 우물거림 다음 삼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전에도 주일 저녁 만찬으로 갈비를 먹이면 다음날 큰일 본 내용물 중에 커다란 뼈 조각이 듬성듬성 섞여 있곤 했다. 

 

그날따라 군이의 눈빛은 찬란히 빛나고 종종 뛰는 모습도 보여주어 우리 모두를 황홀하게 만들어 준 저녁이다. 몇번의 하이 파이브와 뽀뽀도 덤이었으니 말 그대로 “Happy New Year!”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밤” 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지나친 행복감이 들때는 왠지 그 행복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현실이 되어 돌아 온다는 경험이다. 

 

그렇게 몇번 흥에 겨워 껑충껑충 뛰던 군이가 전속력으로 고양이를 쫓아 달리기 시작하더니만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거대한 아이가 전속력으로 달려 나무 사이로 사라진 2m 정도 아래는 해안 순환도로이다. 군이의 비명이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정말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 더 공포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은 그곳을 정신없이 달리는 차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반대편에 있는 집 대문을 지나 정신없이 달려간 그곳에서 군이의 고통어린 눈빛과 신음소리를 들으며 누구인지도 모를 대상에게 나도 울부짖고 싶었다. 잔디 치우는 구루마(?)에 간신히 군이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에 나의 머리는 수많은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차서 들고 있기가 벅찰 정도였다. 병원행을 위해 차에 태울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우리의 손과 발은 마구 물렸지만 우여곡절끝에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병원 갈때는 그렇게 차에 안타겠다고 난리를 치더니만 집에 오려고 하니 아주 순한 어린양이 되어 순순히 차를 탔을뿐만 아니라 차에서 내려 다시 구루마에 태워 옮길때는 말그대로 집에 온 기쁨으로 애교를 부린다. 가슴이 뭉클해 진다. 아, 너는 다시 버려질까 차를 안타려 했고 이제 네 집은 ‘여기’라는 것을 아는구나.... 우리 모두 이런 교감으로 인해 잠시 할 말을 잊고 있을 때 우리 작은 상전 돌이는 형이 타고 있는 그 구루마에 자기도 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게 두 녀석을 태우고 가는 우리의 모습은 영락없이 상전을 모시고 가는 가마꾼의 모습이다....

 

그 후 처음 5개월 정도는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군이를 먹이고 빗기고, 제일 힘든 응아와 쉬를 해결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아이는 점점 ‘우리가 가족’임을, 이곳이 ‘자신의 집’임을 알아 갔고 입질보다는 손을 내밀고 눈을 마주치며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집안 족보얘기를 하라고 채근해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른쪽 앞다리를 조심하며 불안정하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해 늦여름이 되자 군이는 안정된 자세로 걷게 되었다. 그러나 다친 다리의 굵기가 다른 다리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우리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고구마 오븐 구이를 물과 함께 잔뜩 챙기고 왕복 3km 정도의 해변로로 매일 산책을 나섰다. 

 

그렇게 겨울을 맞자 군이의 다리는 아주 튼튼해져 다시 마당의 고양이들을 쫓을 수 있게 된다. 우리도 가뜩이나 긴장하지만 군이도 나름 아픈 경험이 지긋지긋했는지 마당 안에서만 고양이들과 전쟁을 해댄다. 여기서 마당 너른 집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얘기로 끝나길 얼마나 소망했는지.... 그러나 언제나 삶이 그러하듯, 한 아이의 성장통을 지나면 그 뒤를 이은 또 다른 아이의 성장통이 기다렸다는 듯이 슬며시 얼굴을 디민다. “이제 내 차례인데 전 좀 살살 할게요... 형은 짧고 굵게 큰 사고를 쳤지만 저는 그냥 가늘고 길게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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